여자들의 유쾌한 질주

2007. 10. 30. 12:35

서른 살이 될 그녀들에게  
[북리뷰] 여자들의 유쾌한 질주 / 한국여성민우회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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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현실은 왜 나와 자꾸 충돌하는지, 무엇이 불편하고 고통스러운지, '그들'과의 소통은 왜 어렵기만 한 것인지를 들추어내고 직시하는 일이다. 차별이 없는 조화로운 삶을 살고 싶은 여성들에게 그것은 '열린 소통과 연대를 꿈꾸는 행복한 실천'이기도 하다. 불편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길. 오늘도 많은 여성들이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면서 그렇게 그 길을 걸어간다. 

행복한 여성주의자를 꿈꾸는 평범한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책에 담았다. <여자들의 유쾌한 질주>는 한국여성민우회의 회원들과 활동가들이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경험한 삶의 희로애락을 짧막한 글로 엮어낸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여성주의자라도 좋고 아니어도 괜찮다. 여성이라면 대부분 공감할 만한 솔직한 이야기들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내 속에서도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아진다. "너와 나의 삶을 마주보고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자." 이 책이 독자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자 즐거움이다.

다음의 글은 <여자들의 유쾌한 질주>를 읽고 난 뒤 떠오른 '나'의 이야기다. 이 책의 또 다른 번외편 또는 5장으로 끝난 이 책의 새로운 6장. 다음은 당신의 차례로 남겨두면서.

# 여자의 적은 정말 여자인가?
작은 회사에 다녀서인지 임신한 여성과 일해 본 경험은 몇 손가락에 꼽히지만 동료들은 모두 자신의 일처럼 고민하던 좋은 사람들이었다. 남자 선배들은 담배 피우는 일부터 조심했고, 동료들은 규모가 작다보니 뾰족하게 업무 조정을 해 줄 수 없는 현실을 자신의 탓인양 미안해했다. 그래도 회사 내부의 사정과 상식적인 선을 감안해 임신한 동료를 배려하는 크고 작은 노력들이 이뤄지곤 했다. 그런데 정작 아이를 낳아 키운 경험이 있는 한 여자 상사의 반응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나 임신해서 회사 다닐 때는 그냥 다 했는데…" 그냥 흘려듣기엔 뜨악했고 남자 후배들 앞에선 낯이 뜨거워졌다. 그래서 뭘 어쩌란 말이지?

시어머니에게 '당하고' 살던 며느리가 나중에 똑같은 시어머니가 된다더니 그래서 여자의 적은 여자란 말인가? 지난 주말 아침에 본 MBC '환상의 짝꿍'에서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에게 출제된 문제의 '정답'이기도 했다. 속담도 아니고 새겨야 할 격언도 아닌 저 문구가 아이들이 맞춰야 할 명제가 되다니. 또 한번 낯이 뜨거워졌다. 여성에게 든든한 빽은 바로 여성이라는 사실을 저 아이들이 분명히 알 수 있도록 나부터 노력해야겠다고 다짐 또 다짐했다.

# 보고 싶어요
취재를 다니다보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그런데 그들에게 나는 기자가 아니라 '여기자'다. "어디 가서 칵테일이나 할까?"란 말은 부지기수로 들었다. "언제 술 한잔 합시다"라는 인사치레만은 아니었다. 기자와 취재원도 사람이고 같이 만나 밥도 먹고 술도 마신다. 개인적으로 편하게 지내고 친분을 쌓고 싶은 사람들도 분명히 생긴다. 그렇지만 겨우 한두번 만난 기자에게 분위기 좋은 곳에 가서 칵테일 한잔 마시자는 느끼한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지난해만 해도 최연희 의원과 시민의신문 이형모 사장이 성추행 사건으로 큰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얼마전에도 한 방송사의 PD가 동료 작가를 성추행한 사건이 있었고, 한 언론사에선 선배 기자가 수습 여기자를 성추행해 파문이 일었다. 업무 시간이든 회식 자리이든 나이 어린 여자 직원에게 가해지는 상습적인 성추행은 이루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빈번하다. 그러나 내부에서 쉬쉬하는 사이 수많은 여성들의 가슴엔 피멍이 들고 있다.

술 자리에서 내 어깨와 볼과 허벅지를 스쳐가던 장면은 수없이 그리고 또렷하게 각인돼 있다. 몇년 전엔 밤 11시쯤 한 취재원으로부터 '보고 싶어요'라는 문자를 받아들고 난감한 기분에 머리속이 멍해졌던 기억도 있다. 다음날 취재할 내용이 있어 연락을 취해야 할 사람이었지만 끝내 무시해버렸다. 난 여기자가 아니라 그냥 기자이고 싶다.

# 아이는 언제 낳을 건가요?
2004년 여름, 한 회사에 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러 갔다. 남자 세명과 여자 두명이 집단 면접을 보는 자리였는데 면접관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아이가 아직 없던데 계획이 있습니까?" 무엇을 알고 싶어하는지 그 의도를 되묻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순간 머리 속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야 할까, 아니면 절대 당분간 계획이 없으니 뽑아주기만 하면 회사에 피해주지 않고 열심히 일하겠다는 충성 서약을 해야할까. 결혼한 30대 여성에게는 경력이나 능력, 비전 보다 예비 임산부라는 현실 장벽이 더 높기만 했다. 면접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꾹꾹 참았던 분노가 치밀었다. "개인의 출산 계획이 회사 입사와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성차별 면접 아닌가요?"라고 따지지 못한  걸 두고두고 후회했다.

#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
시간이 참 빠르게 가버린다. 나이를 먹으면서 세상은 나에게 정해진 틀대로 왜 살지 않느냐고 자주 말을 걸어온다. 결혼을 안한 사람에게는 언제 할 것이냐는 독촉이 있겠지만 결혼한 나에게는 빨리 아이를 낳아서 엄마부터 되라는 걱정이 돌아온다. 아이를 봐주시지 않겠다던 시부모님들도 손수 봐줄테니 낳기만 하라고 말씀하시고 친정 부모님은 결혼한 지 한참 된 딸이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늘 노심초사다.

서른이 넘기 전에 결혼을 해야 하고,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아 키워야 하고, 집을 장만해야 하는 세상의 계획표가 빽빽하게 짜여져 있다. 이것을 잘 지키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은 걱정을 하고 안달을 한다. 남들과 아주 다르게 특별하게 살고 말꺼야라는 거창한 다짐도 아니건만, 사는 방식이 조금만 다르거나 아니면 남들보다 조금 늦거나 앞서 가는 것인데도 그 정해진 시간의 틀을 벗어나 있으면 세상은 자꾸 불안감을 떠안겨준다.

직장 경력이 쌓이면 대리와 과장, 차장을 달아야 하고 어느 정도 사회적 성공을 거둬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떨치기 어렵다. 스스로에게 부여한 삶의 목표대로 차근차근 올라가는 것이라면 참 좋겠는데 어느 순간 세상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면 불행하다고 느끼게 된다.

나이에 따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승진을 하고 집을 장만해야 하는 세상의 시간표에 쫓기기 보다 삶을 살아내는 지혜가 생기고 말하는 입보다 듣는 귀가 더 열리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다. 나이와 조건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좁은 시선으로 사안을 재단하는 어리석음이 점점 줄어들길 바란다. 혼자 고민하고 혼자 아파하는 시간들이 아니라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지지하며 걸음을 걷는 시간이길 원한다.

'불편한' 일상의 삶을 외면하거나 감추지 않고 꿋꿋이 수다를 떨며 살아내고 싶다. 내가 성장하는 만큼 주위 사람들도 함께 성장하고 세상도 같이 달라질 수 있도록. 여자들의 유쾌한 질주엔 그러한 힘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미디어스> 2007년 10월 22일(월) 18:12:52 서정은 기자  punda@mediaus.co.kr 

Posted by pu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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